! 영화 〈인셉션〉 기반 세계관, 캐릭터 및 스토리
! 주동인물의 범죄·비도덕적 행위 묘사
! 제한적인 수준의 동물 사체 묘사
기밀을 다루는 이들은 대개 인터넷을 멀리하고는 했다. 높으신 본인들이 잘 모르는 분야니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류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를 통해 작성되어, 곱게 인쇄해 스테이플러로 구석이 모아 찍혀 있었다. 한 덩어리의 문서가 아치발트 키르마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장씩 뒤로 넘어갔다. 직업과 이름을 비롯한 인물의 기본 정보가 적힌 페이지 다음에는 A4 종이 크기로 인쇄된 이미지가 대여섯 장쯤 이어졌다. 같은 카메라나 스마트폰 앱으로 촬영했는지 16:9 비율로 비슷비슷한 사진 규격. 사무실 테이블에 앉아 말을 하는 사진, 정면에서 찍은 전신사진, 가슴까지 프레임에 담긴 바스트 쇼트, 우주복을 입고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구도였다– 사진, 심지어 바스트 쇼트는 각각 90도 좌측과 우측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이미지였으나, 맥락을 생각하면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특수한 기술을 통해 사람의 꿈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머릿속 정보를 빼오는 일을 했으니까. ‘공유몽’, 혹은 ‘디셉션’ 기술을 통한 정보 ‘추출’은 일종의 첩보 활동이자 심리전이었다. 원칙은 표적이 된 사람이 사건의 전말을 모르도록 진행하는 것. 그러니 평범한 인물 사진은 구도가 몹시도 다양했다. 건물 천장에 숨어들어 찍은 탓에 인물의 정수리가 도드라져 보이거나, 먼 거리에서 배율을 높이 당기거나, 인물 앞을 빠르게 이동하며 촬영해 사진이 흔들리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표적이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다는 것은 작전 시행 전부터 들켰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이 사진들은 지나치게 정면 구도였다. 사진 속 인물을 한 장 한 장 유심히 응시하던 아치발트 키르마는 기어이 한쪽 눈썹을 느리게 밀어올렸다. 제게 이 일을 은밀히 의뢰한 기업체, 알바트로스 사(社) 직원이 했던 말을 조용히 다시 떠올리면서.
– 알바트로스의 전신은 레이더와 통신망 개발을 해온 방위산업체 ‘아가사’죠. 민간 우주 기업 ‘레굴루스 코퍼레이션’은 당사의 법인명이 아가사였던 시절부터 당사와 함께한, 알바트로스가 28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계열사입니다. 표적은 최근 레굴루스의 우주선 발사 실험에 참가한 미션 스페셜리스트로, 그에게 디셉션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레굴루스 코퍼레이션이죠. 현재는 알바트로스에서 결정권을 모두 위임받아 작전을 진행 중이니, 책임 소재는 분명합니다만…….
자신의 이름을 ‘에리카’라고 소개한 직원의 갈색 머리카락은 턱선 바로 아래까지 와, 안으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아스카, 다코타, 플로라, 에이미, 그리고 에리카. 아치발트는 지금까지 만난 알바트로스 직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네이밍 센스는 한결같다 못해 유머러스했고, 또 한편으로는 냉정하기도 했다. 그의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은 에리카의 미소가 상냥한 한편 기계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하는 말은 주절주절 길었지만, 결국 요점은 간단했다. 민간 우주 기업 레굴루스 코퍼레이션은 우주 비행을 마치고 온 직원의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어서 모기업에 의뢰했고, 키르마 인더스트리 오너의 차남이자 디셉션 기술자인 아치발트 키르마는 외주 인력으로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 표적이 누구냐면… 아치발트는 사진 속 인물의 우주복 끄트머리에 달린 자그마한 태그를 눈으로 읽었다. ‘J. 머독.’ 머리글자 ‘J’로 시작하는 이름은 많았다. 저스틴, 제리, 존, 제이크, 잭… 제이슨. 표적은 제이슨 머독이었다.
직업은 우주 비행사, 일 년의 여행을 마치고 지구에 발을 디딘 지 한 달째. 추출할 정보는 의뢰를 수락하기 전까지는 비공개. 비행 직전 및 최근의 행적과 머독이 우주인으로서 연구한 분야에 관한 설명이 담긴 줄글이 사진 뒤로 몇 장이나 이어졌다. 아치발트가 20분이라는 시간 동안 느긋하게 파일을 정독한 뒤 뒷표지를 덮자 에리카는 서류 뭉치를 손가락으로 긁어 고스란히 회수했다.
아치발트가 서류 내용에 관해 말이 없자, 에리카는 제안을 이어갔다.
“일을 수락하면 아치발트 씨는 진행 중인 일에 중간부터 합류하게 됩니다. 사전 작업에 참여할 필요 없이 전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장점이지만, 그만큼 까다롭고 제한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아치발트 씨가 원하는 대로 작전을 차근차근 세팅할 수는 없을 가능성이 커요. 물론 이제까지의 진행 상황은 숨김없이 공유할 것을 약속드리죠.”
“그건 나도 알아요. 일은 어렵고, 진행은 더딘 데다가 조건은 단점밖에 없지.”
그는 에리카가 언급한 일련의 ‘장점’을 단번에 무시했다.
깍듯한 매너로 겉을 포장했으나, 그 아래에 깔린 싸늘한 기운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남의 작전에 중간 합류하는 걸 유리하게 생각하는 추출자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거절일까요.”
에리카의 말투는 깔끔했다. 그래도 내리깔린 시선에서 미력한 아쉬움이 읽혔다. …미련이 느껴진다면 주도권은 이미 이쪽에 있다고, 아치발트는 판단했다. 기업의 자본 규모나 디셉션 분야의 선진적인 기술력 자체는 알바트로스가 키르마 인더스트를 웃돌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쪽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리지 못할 건 없었다. 특히 상대가 아쉬운 점이 있어 이렇게 먼저 부탁해오는 순간에는. 대화에 생긴 짧은 틈을 타 그는 계산을 끝냈다. 언제까지 비협조적인 척을 해야 할지, 그 타이밍에 관해서였다.
1분도 남지 않았군. 아치발트는 결론을 내며,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내 권한은 어디까지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해진 게 없다면, 이쪽에서 요구하죠.”
요구 사항은 세 가지였다.
***
하나, 추가 인력 요청을 제한 없이 들을 것.
“그래서 저를 부른 건가요.”
작업장은 레굴루스 코퍼레이션 본사가 위치한 미국 콜로라도 주의 호텔 6인실. 묵는 인원이 많아 방에는 부엌과 안쪽 침실이 두 개 딸려 있었다. 대규모 작업이 공사가 중단된 폐건물 따위를 빌려 이루어진 것을 고려하면 제법 단순하고도 깔끔한 장소였다. 다만 ‘추가 인력’보다 미리 온 손님들이 호텔 방의 여유 공간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으니, 모두 눈을 감고 잠들어 있지만 않았다면 피곤한 광경을 연출했을 뻔했다.
큰 침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든 사람들은 얼핏 링겔처럼 생긴 긴 튜브를 손목에 테이프로 붙이고 있었다. 손목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선 끝은 서류 가방 크기의 낯선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기술자들은 이를 ‘패시브 디바이스’라고 –혹은 간단하게 줄여서 ‘드림 머신’, 혹은 ‘라디오’라고– 불렀다. 하나의 꿈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디셉션 기술의 중심이 되는 장치.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물었을 리는 만무하니 질문을 받는 이는 아치발트 키르마였다.
“그럼요.”
그는 짧게 대꾸했다. 동행한 에리카가 보지 못하도록, 가볍게 눈짓하면서.
“…….”
에리카의 키보다 높은 위치에서 시선이 소리 없이 맞물리면, 위지 앤서니는 신호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 입을 다물었다. 그건 보는 제3자가 있을 때는 대화를 자제하자는 의미였으니까. 질문이 이어지지 않자 아치발트는 태연하게 눈을 돌렸다. 패시브 디바이스 체크가 끝난 에리카가 사진 밖으로 튀어나온 제이슨 머독의 몸을 끙끙대며 옆으로 밀어 눕히고 있었다. 머독은 오래 한 자리에 누워 있었는지 피부가 세게 눌려 얼룩덜룩했다. 또한 그의 손목 근처에는 연결선이 두 줄 더 튀어나와 있었다.
“이게 영양을 공급하는 선들이에요.”
색상이 다른 선을 옆으로 들추며, 에리카가 말했다.
“두 분이 꿈에 진입하면 꿈 밖에서 표적의 건강 관리는 제가 할 예정이고요.”
일면식 없는 사람이 다루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치발트는 이미 들었던 내용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에리카의 리마인드가 이어졌다. 이 분들은 지금 한 명을 제외하면 이미 공유몽에서 깨어난 상태예요. 섬나신 –패시브 디바이스와 함께 사용하는 특수 약물을 이렇게 부른다– 용량이 남아서 잠들어 있을 뿐이죠… 아니, 짧은 의식불명 상태라고 해야 할까. 여러분이 진입하면 꿈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술자도 깨울 테니, 꿈에 진입하면 사람은 두 분과 표적만 존재하게 될 겁니다. 다른 사람은 전부 꿈이 만들어낸 거짓 등장인물, 즉 투사체가 되겠지요.
“준비가 끝나면 불러주세요. 더 늦기 전에, 10분 내로 오셔야 해요.”
실은 준비할 것도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안쪽 방으로 들어가 겉옷과 소지품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으면 될까. 사실 이조차도 필요 없을 만큼 두 사람은 프로였다. 어느덧 아치발트는 7년, 앤서니는 16년이 넘게 디셉션 경력이 쌓인 채였으므로. 그러니 두 사람은 짐을 내려두며 긴장감 없는 마무리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벌써 2주를 저렇게 누워 있었다는군요.”
“그런가요.”
“말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최소 인력으로 진행해야 하죠.”
콜로라도의 봄 날씨는 이른 여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코트를 따로 걸치지 않고 온 아치발트는 모자만 벗어 원목 스탠드 행거 끝에 올려두었다. 그러면서 앤서니 쪽으로 내미는 손길은 제법 자연스러웠다. 앤서니가 벗어 건네주는 얇은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행거에 걸치는 행동까지도. 그 역시 이미 설명한 이야기를 앤서니에게 전했다. 위지메디컬의 의료기기 엔지니어로서 평일 근무를 마치고 밤 비행기로 급히 콜로라도에 불려온 앤서니는 제법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몇 번이나 반복해 알려주는 편이 나아 보였다.
“깊은 꿈으로 들어가서도 안 되고, 구조 설계에 멋대로 손을 대서도 안 되고, 추출도 진행하지 않아요.”
“말한 내용이잖아요, 아치발트… 금고가 없다는 거.”
작전의 특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굳이 표적을 2주나 재운 것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본래 꿈은 현실보다 5배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 않던가. 오래 걸리는 작전이라면 ‘꿈 속의 꿈’, 현실보다 시간이 25배로 느리게 흐르는 2단계나 125배로 느리게 흐르는 3단계 꿈을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만큼 꿈이 불안해진다는 위험 요소는 있었으나, 꿈이 길어질 때 겪는 불편도 결코 만만치 않았으니까.
금고가 없다는 말은 추출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동일어였다. 꿈에서 ‘추출’해야 하는 목표 정보는 금고에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반드시 시멘트로 속을 채우고 다이얼을 돌려 여는 금고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게 무엇이든 봉인이 되어 있어 잠금을 풀고 알맹이를 꺼내야 하는 구조는 같았다. 아치발트 같은 추출자가 작전을 세우고, 앤서니와 같은 직종인 설계자가 디자인하는 공유몽의 구조는 언제나 후미지고 은밀한 장소에 금고를 숨기고 있었다. 작전은 미로를 뚫고 깊숙이 진입해 금고를 여는 행위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풀어 말하자면, 알바트로스의 이번 의뢰는 기묘하리만큼 조심스러웠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 것. 금고를 열지도 말고, 많은 사람이 진입해 –꽉 찬 한 팀은 보통 ‘포인트맨’이나 ‘포저’, ‘약제사’ 등을 포함해 4명에서 5명으로 구성되었다. 단 2명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작전은 사실상 없다시피하다– 표적의 무의식을 흐트러뜨리지도 말고… 꿈의 세상을 그대로 둘 것. 거듭된 당부는 실행 요원의 안전보다는, 온전한 결과물을 위해서였다. 아치발트는 ‘추출’이 아닌 범위에서 주어진 에리카의 임무를 곱씹어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당신이 제일 잘 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대답하지 않고 넘긴 질문에 뒤늦게 응수했다.
작전의 표적, 제이슨 머독은 우주를 떠돌며 ‘어떤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가 본 풍경 혹은 존재… 어쩌면 고등한 우주 생명체는 그의 머릿속에만, 그의 무의식 속에만 존재한다. 레굴루스 코퍼레이션과 알바트로스는 되도록 가장 온전한 형태로 그 모습을 관찰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공유몽 배경을 디자인하는 설계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금고도 그대로 두고, 한 가지 배경을 보존하고자 사람을 무려 2주 동안 깨우지 않고 잠재운 것이다.
이번 작전에 한해서 두 사람은 첩보원이 아니라 탐사대였다. 패시브 디바이스에 매달린 저화질 모니터링 장치를 통해 보면 꿈속은 다행히 황량한 우주가 아니라던가. 낡은 도시 풍경을 한 꿈속에서 두 사람은 최대한 내부 구조를 파악해 돌아와야 했다. 꿈의 구조가 담긴 지도를 그려오는 거다. 알바트로스가 요구한 정보는 그게 다였다. 표적의 온전한 무의식.
같은 가문, 회사에 소속된 사람은 알바트로스에서 꺼리더라는 정보를 아치발트는 의도적으로 눈감았다.
이틀 전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비공식적인 루트로 입수한 연락처로.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전화번호를 통하면 앤서니의 거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VIP를 위한 연락처니까.
– 표를 보낼 테니 내일까지 와요. 덴버 공항에서 시간 맞춰 기다리죠.
그가 통보하자, 앤서니는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 제일 빠른 표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거예요, 덴버는 국제공항이니까…….
긍정마저 생략된 문장이었다.
“…잘할게요.”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당연하죠, 그건 당신 몫이잖아.”
유머러스하지 않은 말에 아치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에 부탁한 일에서는 사람을 대하는 일도 잘했다는 칭찬도, 그 외 실없는 말도 할만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아치발트가 앤서니보다 소통에 능한 사유는 훈련이 되었다는 주된 이유 외에도 쓸데없다고 판단한 지점에서는 거짓말을 하거나 매끄럽게 입을 다물어서도 있었다. 말마따나 협상은 아치발트 키르마의 몫이었다.
그의 두 번째 요청은, 알바트로스가 최종 습득한 정보를 모두 실행 요원에게 공유해줄 것. 작전 착수 보상과 별개의 요청이었다.
아치발트는 알바트로스를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앞서 수상한 작전을 한 번, 그리고 실행 기술자를 속이고 진행한 작전을 한 번 꾀한 적 있었다. 하지만 앞선 위험한 경험들 때문이라기보다… 그는 원래 그랬다. 타인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반면 이는 그가 이토록 철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유머도 없이, 방심도 없이. 그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옷차림으로 침대가 모인 방에 다가서서 문고리를 돌렸다. 앤서니가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에리카를 도와 이미 꿈에서 튕겨져 나온 이들을 옆방으로 끌어 옮기고, 빈 침대에 신체를 온전히 기댔다.
“앉는 게 편합니다만.”
“주사가 12시간 분량이라, 그 시간 내내 앉아 있으면 몸에 부담이 갈 거예요.”
에리카의 말 때문이었다. 꿈에서 이틀하고도 반을 보낼 수 있는 분량. 시간이 종료될 즈음에는 에리카가 헤드폰으로 노래를 틀어 주기로 했다. 현실에서는 길거리를 걷더라도 좀처럼 귀에 들어올 일이 없는 오래된 외국 곡이었다. 꿈에 진입하게 된다면… 그 이상 에리카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모든 게 실행 요원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꿈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추출자의 책임이었다.
요청 셋, 의뢰인은 꿈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치발트 키르마는 자신 있었다. 그는 위지 앤서니보다 조금 늦게 눈을 감았다.
***
다시 눈을 뜨면 풍경이 변해 있었다. 들은 대로 우주는 아니고, 꾀죄죄한 호텔, 아치발트 키르마는 물이 바싹 말라붙은 욕조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외곽이 구불구불한 곡선 모양인 아이보리색 욕조는 188센티미터의 신장이 전신을 눕히기에는 부피가 충분치 못해서, 팔다리는 구겨지듯이 접힌 채였다. 욱신거리는 근육을 당기고 이완해 아치발트는 겨우 몸을 일으킨 뒤, 벗겨져 욕조 바로 옆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에 발을 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함께 공유몽에 진입한 앤서니는 욕실 밖 침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낮은 천장에, 창밖은 어두웠다. 구둣발 아래로 밟히는 카페트 바닥은 묘하게 축축하기까지 했으며 벽지 무늬는 연녹색 배경색에 진한 이끼색으로 나선형 문양이 어지럽게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반복되었다. 구석구석 곰팡이가 슨 벽, 싸구려 접시 위에 놓인 먹다 만 샐러드와 햄버거. 형광등 스위치를 눌러도 전구가 고장난 듯 방은 반절만 밝아졌다. 연주황색 불빛이 감도는 천장, 초록색 벽, 물을 먹어 검붉어진 카페트가 깔린 바닥, 그리고 회색으로 어두운 창밖. 단언컨대 현실에서 흔히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아무리 설계 없이 진입했다고 해도…….’
이렇게 서로 떨어져서 들어올 수가 있나. 그가 판단하건대 잠에서 깨는 행동도 일상적이지는 않았다. 아치발트는 기이하게 생긴 내부를 가만히 둘러보다가, 타인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문 밖은 복도. 방 밖까지 어둑어둑한 천장 조명이 특이했는데, 그보다는 몇몇 방문이 빼꼼히 열린 채라는 게 그의 이목을 끌었다. 첫 번째 방은 빈 방이었고, 두 번째 방에서는 두 명의 손님이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세 번째 방에서 앤서니가 발견되었다.
그는 침대 앞 테이블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정신이 늦게 드는 모양인지, 평소라면 근처에서 인기척만 느껴져도 눈을 뜰 사람이 어깨를 흔들어도 기상이 늦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탁상시계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이 한 점에 겹친 시간.
자정.
“앤서니.”
이름을 부르자 정확한 자정에 앤서니가 깜빡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깨워도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아치발트는 이제까지 파악한 정보를 머리에 그대로 주입하듯 전했다. 자신이 어디서 눈을 떴는지, 무엇을 보고 어디를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이 자정이라는 것과 최종 결론까지.
“…수상한 점은 남아 있지만, 무사히 진입한 것 같네요.”
“기다려요, 머리 아파.”
“시간이 별로 없는데. 5분 줄게요.”
그러나 앤서니는 5분이 차마 지나기 전에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천장을 보고, 벽과 바닥을 보고, 침대를 보고, 모든 것을 눈에 담는 사람처럼 –지도를 그리기에 알맞은 인력처럼– 그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와 상하로 움직였다. 그런데도 시계는 여전히 자정을 가리켰다. 초침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아치발트가 멈춘 시계를 들어올렸다.
‘고장이 났나.’
생각하기 무섭게, 앤서니가 말을 걸었다.
“저거 봤어요?”
“뭘?”
그의 시선이 침대 머리맡을 향했다. 베개 근처가 정체를 모를 액체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물기와 불룩하게 솟아난 이불에 눈을 고정하며, 아치발트가 먼저 그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젖은 흔적을 손끝으로 누르면 침구가 내뱉은 점도 낮은 액체가 장갑을 적시고, 액체에 섞인 날카로운 알갱이가 가죽 재질의 장갑 표면을 긁었다.
“…물이네요.”
그리고 알갱이의 정체는 유리였다. 깨진 유리조각. 물은 또한 상당히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이어 이불을 걷었다. 솟아오른 형상에 비해서는 조그마한 물체가 그 아래에 위치했다.
“아.”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앤서니가 작은 소리를 냈다. 움직임을 멈춘 금붕어가 침대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 주홍빛 비늘과 둥그렇게 뜬 눈이 물기 없이 말라 있었다. 부서진 어항, 증발한 물. 어류가 물밖에서 살 수는 없으니 틀림없이 사체였다. 녀석이 언제부터 이런 꼴이 되었을지는 두 사람으로서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둬요.”
아치발트가 이불을 내리는데, 앤서니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웬만큼 다급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행동. 먼저 손을 뻗고도 놀란 그가 억눌린 목소리를 흘렸다.
“잠깐…….”
그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점으로 향했다.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미세하게 팔딱거렸다.
살아 있었다.
아치발트가 유리가 묻지 않은 쪽 손으로 비늘이 마른 금붕어를 건져 올렸다. 딱히 오래 관찰할 가치는 없어 보였으나, 깊은 생각이 없어도 하여간 욕조든 세면대든 아무 수조에나 담아둘 심산이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욕실에서 이어지는 동안 앤서니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자정에 시간이 멈춘 탁상시계로. 예민한 그의 귀에는 들린 것이다. 시계 초침이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복도를 디디는 십수 개의 발걸음 소리가.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일제히 문틈새로 지나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분명히 J. 머독, 작전의 타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