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골적인 수준의 살인·상해 묘사
! 그 외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묘사 다수
더 아일랜드. 건물 밖에는 섬이 있다.
건물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섬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환상적인 바깥에 관해서는 소문만 떠돌아 신경을 자극하기 일쑤였다. 신선한 바람이 불고, 바다는 산들산들 파도를 밀어내는 곳.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휴식하기만 해도 되는 공간. 먹을 것도 볼 것도, 놀거리도 건물 내부보다 많단다. 하도 여유로워 섬사람들은 놀다 지쳐 새로운 오락 방법을 내내 연구해야 한다지. 그래도 괜찮을지 몰라, 우리 같은 뜨내기들은 선조들이 연구한 방법만으로도 몇 해를 즐길 테니까, 생각해 봐, 처음 도착하면 눈이 휘둥그레질 거라구. 그런 지상낙원은 말이야…. 건물 주민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조용히 주워듣는 사내의 이름은 ISHAQ 8-EDEN. 두 자리의 숫자가 미들네임처럼 박인 이름은 ‘이샤크 8-에덴’이라고 발음했다.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달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운행을 멈췄다.
“하지만, 그래도.”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리자 길게 난 틈 사이로 건물 중앙 로비와 식당이 보였다. 차곡차곡 쌓였던 사람들은 앞에서부터 하나둘씩 빠져나가니, 덩어리진 군집은 움직이며 ‘이샤크’의 귓가 더 가까이에 주민의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이어지는 말은 못내 아쉬운 소리였다.
“행운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잖아.”
누구나 섬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건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추첨으로 뽑힌 소수의 이들만 자유를 허가받았다. 당첨되지 않은 이들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샤크-08-에덴은 당연하다고 학습한 개념을 머릿속으로 조용히 훑어보았다. 하지만 과연 누가 개념을 만들었는가. 그는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다. 정확히는 탐구를. 사람은 어떻게 생각을 발굴하고 감정을 쥐어짜는가. 왜 이런 작은 곳에서 매일 눈을 떠야 하고, 왜 정해진 대로 배식을 받고, 왜 의미도 없는 노동을 매일 계속해야 하는가. 그는 궁금했다. 좁은 건물 내부는 이제 다 알았으니까.
이제, 바깥 세상.
그가 바라는 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휴양지의 해변이 아니었다. 지식욕을 채워줄 만한 이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사막. 어떤 메마르고 잔인한 세상이 건물 밖에 있으리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그는 결심했다.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흰 건물 특유의 높은 층고도 평균보다 한 뼘이나 껑충 큰 그에게는 시야를 가리는 천장에 불과했다. 창 하나 나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본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미리 구해둔 조력자에게로.
“레이.”
REI 1-MATADOR. 오십 남짓한 건물 주민을 몇 주 동안 면밀히 관찰한 그가 특별히 엄선한 인물이었다. 또래의 여성,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되 신장이 크고 건강할 것. 이용 가치가 있고 협조적이고, 근력과 지구력이 좋아 부족한 능력을 서로 보완할 수 있다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하는 셈이었다. 저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듯 찬찬히 살펴본 그였으나 마음은 빠르게 굳었다. ‘레이 1-마타도르’와 처음 대면해 말을 나눈 그때였다. 우습고 모순적으로, 첫인상이 좋았다.
흑백 세상에 붉은 보석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 진분홍색 핏기가 도는 뺨과 입술. 다른 사람과는 명백히 달랐다.
“이샤크.”
이름을 부르면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반짝거리는 눈에 비치는 것은…….
“…이샤크!”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
쿵.
둔중한 소리를 내며 사람의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키는 190센티미터, 키에 비례한 평균 몸무게. 황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반쯤 감겼다. 흉기로 사용한 칼은 길이가 짧고 날이 무딘 탓에, 남자의 손가락에도 상처가 남았다. 베인 상처의 찌릿한 통증을 뒤덮는 것은 찐득하고 뜨거운 핏물의 촉각. 소매는 물론이고 상의가 온통 혈액으로 물들어 젖었다. 반격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비슷한 자리에 두어 번 난도질을 반복한 남자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손을 떼어냈다. 결국 칼은 시신의 단단한 근육에 얽혀 꽂힌 채. 죽은 사람에 비하면 손가락에 남은 상흔은 시시했다. 마치 요리 재료를 막 손질한 사람처럼 그는 석제 테이블 위에서 수건을 집어 들어 손을 닦았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낯선 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살해한 남자, ‘이샤크 디아즈’는 그제야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상대는 분명히 초면이었으나, 가만히 보면 얼굴 생김새는 익숙한 것도 같았다. 국제 뉴스에서 봤던가. ‘아일랜드 프로젝트’에 돈을 대고 자신을 복제한 클론을 제작할 정도라면, 분명히 유명인일 테니까. 그는 머릿속에서 정보를 더듬어 한 줄기를 낚아챘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국적은 일본, 직업은 야쿠자. 일대 다 난전의 탈을 쓴 상해 사건에 휘말려 벌써 몇 년째 시한부 환자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던가. 죽었다는 소식은 없고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는 뉴스 또한 들리지 않으니, 분명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요양을 겸해 두문불출하고 있으리라. 그는 상대의 만듦새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의도적으로 이 사람을 동료로 골랐다면 ‘자신’의 지능은 일정 수준에 이미 도달했다고 해도 될 테니. 그러니까 이름이.
“레이. 아리아케 레이였나?”
“…뭐? 레이는 맞지만….”
“네 이름은 그게 맞아. 성보다 이름이 낫다면 그렇게 부르겠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숙인 ‘레이’는 곧 벌건 얼굴을 들고 성큼성큼 이샤크에게로 다가왔다. 뒤로 빠져 거리를 벌려야 할까, 찰나 고민을 하던 차에 주먹이 먼저 꽂혔다. 무기 없이 맨손으로, 깔끔한 공격. 어깨와 가슴팍 사이 즈음에서 퍽 소리가 났다. 멍이 드는 건 기본이고, 조금만 더 힘을 실었다면 내상을 입었을 수도 있겠다. 무게중심이 비틀비틀 흔들려 반걸음 뒤로 밀려나던 그는 멱살 아래쪽을 틀어쥐는 손에 가까스로 평형을 되찾았다. 체격 차이가 있어도 근력이 상대가 더 강했다.
하지만 이샤크는 물러나거나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건 레이가 ‘전형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었다.
“너…!!”
올려다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알았다. 상대는 이성을 잃었다. 분노는 어디로도 퍼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 공격해올 수도 없을 테다. 그건 ‘이샤크 디아즈’인 자신이… ‘레이’의 동료와 똑같이 닮았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닮았는지, 출생 순서는 레이가 인지한 것과 반대였으나 현상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이샤크에게는 거리낄 게 없었다. 이미 정이 들었든 사랑에 빠졌든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한 가짜 덕분에 레이는 눈을 피했다. 그거면 됐다. 이샤크는 공격성이 흐려진 상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문득 닿은 손등은 살아 있는 인간처럼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둔 쪽은 레이였다.
“탈출한 이유가 있을 거야. 목적을 이루는 것쯤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평소와 같은 말투로 그는 속삭였다. 차분한 목소리에 레이의 어깨가 움찔 오그라들었다.
“네가 이걸 나와 같이 치워준다면 말이야.”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한번 닦았을 뿐 제대로 지혈하지 않은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마치 시신이 놓인 그의 자택 대리석 바닥처럼. 기묘한 일이었다. 서로 다른 몸체에서 나온 두 사람분의 혈액은 거짓말처럼 같은 유전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살해했으나 자살은 아니었다. 피가 말라붙은 겉옷 단추를 뒤늦게 끌러내며 그는 차분히 생각했다. 그전에 지혈부터 하는 게 좋겠다고. 타박상은 생각보다도 크지 않은 듯하나, 확인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레이, 서둘러.”
레이는 발바닥이 땅에 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멈춰 있었다. 보다 못한 이샤크가 짧게 재촉했다.
그러면… 말을 들었다. 그를 찾아온 묘한 손님은.
***
–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운전석 문을 열어젖힌 게 두어 시간 전이었다. 아무리 중형 세단이라고 하더라도 도로를 달리지 않고 가만히 주차되어 있을 뿐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답답함을 호소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주차장은 지하 주차장으로 차량을 효율적으로 쌓기 위해 비스듬히 땅을 파놓은 디자인이었다. 보통이라면 문을 열고 탈출할 테고, 과격한 성정이라면 안에서 잠금쇠를 부수고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규칙을 알지 못하는 이는 놀라우리만큼 단순했다. 동승자는 조수석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었다. 온순하게도.
이샤크 디아즈는 운전석에 올라타며 레이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아? 으음…….”
눈가를 비비는 레이의 손목 위로 납작한 타원형 팔찌가 번뜩였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주차장 조명에 반사되어 빛이 점멸한 듯했다. 팔찌 위에 제품명이 반듯한 그래픽 문자로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영어로 ‘REI 1-MATADOR’.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이름 표기 방식이 아니었다. 이샤크는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사방이 어두워 글씨가 잘 읽히지 않았다.
그는 짧은 정적 끝에 운전대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그대로 들어 뻗었다. 손목 위 팔찌에 고정된 시야 안으로 한쪽 팔이 성큼 진입했다. 부쩍 좁아진 거리. 손아귀가 레이의 살갗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금속제 팔찌 위에서 헛돌고, 그는 머지않아 깨달았다. 한 손만으로는 잠금을 해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다른 팔도 움직이면 상체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양손으로 팔찌 양 끝에 매달린 막대를 당기고 버튼을 누르면 경쾌한 소리가 났다. 찰칵.
손목 중앙이 눌리자 레이가 억눌린 소리를 뱉었다. 윽, 아프잖아. 이샤크가 대꾸했다. 미안.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였다.
팔찌 아래에는 레이저로 지진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문자와 숫자가 섞인 일련번호 모양으로. 이샤크는 올록볼록하게 요철이 느껴지는 상처에 눈을 두었다가, 천천히 정면 차 앞 유리로 자세를 돌렸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의 윤곽이 백지에서부터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 정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차는 시동을 걸고 주인을 인식하면 자동으로 움직였다.
“아리아케 레이. 여기서 오래 살고 싶다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겠어.”
“왜?”
“그 사람이 네 원본이니까. 그래야 네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의 눈을 따돌리지.”
“어려운 소리를 하네…….”
“천천히 생각해. 답은 명확하니까.”
바퀴 없는 차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 몇 센티미터쯤 공중에서 운행을 지속했다. 경로는 이미 저장되어 구태여 번거롭게 입력할 필요가 없었다. 크게 익숙하지도 않은 길을 기계장치를 통해 전진하며, 이샤크는 레이가 필요로 할 세간의 상식을 주입했다. 폐쇄 환경에서 살아온 ‘레이’는 근력 면에서는 성인 남성을 웃돌았으나 지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마땅한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이샤크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으나 아예 처음부터 세상을 알리는 일은 쉽지는 않았다.
“…잠깐! 너무 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하지는 마.”
“그래, 이해를 전혀 못 하고 있네.”
“당연하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잠시 군더더기가 최소화될 방법을 고민했다.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우선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넌 아리아케 레이라는 사람의 복제품이야.”
“그 이야기는 이미 했잖아.”
“처음부터 다시 알려주려고 하니까, 가만히 있어 봐.”
그는 했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반복했다. 복제 장기를 필요로 하는 부자들이 있다는 것, 그렇게 태어난 클론, 특이 보험 사업을 시작한 회사. 정·재계의 인물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사업에 투자했다는 것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어렵게 들리지 않도록 한번 다시 요약했다. 그러니까 결함 제품인 ‘레이’를 제조 회사에서 뒤쫓고 있으리라는 경고. 원본이 되는 인물이 자국에서 잠적한 지금은 그녀를 흉내 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조언까지.
설명 도중 그는 차 유리창에 홀로그램으로 된 윈도우를 띄웠다. 인물을 검색하면 조수석에 앉은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물의 입체적인 흉상이 허공에서 360도 회전했다. 그는 ‘원본’의 생김새를 곰곰이 살펴보았다. ‘아리아케 레이’는 인상이 조금 더 날카로운 것 같기도 했다.
“등에 문신이 있네. 일본식… 이레즈미인가.”
그가 손끝으로 홀로그램을 터치해 이동 방향을 조절했다.
“새기는 게 좋겠어. 손목의 식별 번호는 지우고.”
레이가 화면과 자신의 손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기를 잠깐.
어떻게 새기고 지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샤크는 원인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가리기라도 해.”
손목을 톡톡 가리키며 차선책을 제시하자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사이에 그는 목적지를 변경했다. 원본과 제품을 비교한 뒤에는 할 일이 단순해졌다. 선명한 비주얼이 존재하는 비교군이 있으니, 저렇게만 만들면 되는 거다. 머리카락을 다듬고 새 옷을 사자. 당분간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세상을 배우는 편이 좋을 테니, 외출복과 파자마를 포함해 대여섯 벌 정도. 신발도 자신의 것을 공유할 수는 없을 테니, 편히 신는 것과 격식을 차릴 때 알맞은 단화로 두 켤레쯤 놓아두면 좋을 테다. 채워 넣어야 할 생필품이 있다면 함께 구매해도 나쁘지 않겠고. 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무대 위에 새로운 인물이 번듯한 의상을 입고 올라섰다.
“저기, 이샤크.”
무의식이 조종하던 인물의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환상을 깨뜨리고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면 그… 그거, 버리면 안 됐던 거 아니야?”
시신을 호칭하는 대명사가 어색했다. 냉큼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물건 취급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일까.
레이가 오해한 게 있었다. 그들은 쓰레기장이 아닌 병원에서 출발했다. 병원에서 업무를 보고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던 차에 방향을 돌려 백화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샤크는 질문을 듣고 순간 ‘아는 의사’가 시신을 보고 내린 진단을 곱씹었다. 복제인간을 필두로 한 보험 프로젝트를 알고, 이샤크 디아즈의 계약을 도왔으니 떳떳한 사람은 아니었다. ‘장기가 이렇게 손상되었다면 못 쓰게 될지도 몰라. 최대한 복원해 적출해보기는 하겠지만…’ 진심이 몇 퍼센트나 담겼든 들리는 말투 자체는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실내를 전부 깔끔하게 치우고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느긋하게 옮겼으니, 그만큼은 신선도가 떨어진 셈이었다.
이샤크는 그때 자신이 대답한 말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괜찮아.”
그는 진실로 괜찮았다. 하지만 왜?
***
[…오늘 오후 7시, 귀하의 자택으로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텍스트 메시지를 받았다. 보낸 이는 ‘회사’. 인간을 복제하고, 규칙에 따라 키워나가며, 또 두 개의 제품을 사고로 분실하고 만 회사 말이다. 이샤크 디아즈는 오전 중에 확인 답신을 보내고 오후 일곱 시에 맞춰 집에 도착했다. 개인 주차장에 넓적하게 생긴 차를 대고,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 앞에 도달했다. 이상한 기분이 머리보다도 근육을 먼저 긴장시켰다. 의아한 점 몇 가지. 도착 십 분 전에 사측에서 보내기로 한 메시지가 없었다. 지각한다는 말도, 방문객 알림도.
지문 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누르자 현관문이 미닫이로 열렸다. 신발장 앞이 물로 흥건했다.
“…?”
그는 가방과 겉옷을 현관에 내려놓고 정리하며 미간을 좁혔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코가 마비될 것처럼 진한 피비린내가 실내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사람 피를 닦아내고 소독한 것이 벌써 몇 개월 전이었다. 환취가 아닌 이상 지운 냄새가 다시 올라올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 자국을 따라 이샤크는 발을 옮겼다. 실내 깊은 곳으로. 혈향은 더욱 짙어지고 물기는 점점 어두운색을, 특이한 점도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 축축하고 붉게 젖은 옷소매, 엎어진 뒤통수, 머리카락, 사람의 등, 칼자국이 남은 옷감, 깨진 꽃병, 부러진 꽃대, 꽃병에서부터 흘러나온 물. 사람이 엎드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머리로도 몸 아래쪽으로도 피를 흘리는 ‘손님’은 이번에는 초대받은 사람이었다. 출혈이 어찌나 심한지 몸뚱어리는 움직이지 않고, 혈액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이샤크는 쓰러진 사람을 더 살피는 대신 이 집에 있어야 할 다른 사람을 추적했다.
“여기 있었네, 레이.”
복도에서 코너를 돌면 서재 방이 바로 보였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사람이 보였다. 피를 뒤집어쓰고 손에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의외로 공포에 질린 얼굴은 아니었다. 조금은 평소 같기도 했고, 평소보다 냉정해 보이기도 했으며, 다이아몬드와 같은 눈동자에서는 결연함마저도 느껴졌다. 웃지는 않았다. 단 하나 분명한 게 있다면,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쥔 레이에게 이샤크가 다시금 말을 걸었다.
“네가 그랬어?”
“…응.”
“왜?”
“나를 찾아온 것 같아서.”
뚝뚝 끊어지는 대답은 묘하게 억눌려 있었다.
거칠거칠한 무언가가. 그는 위아래로 상대를 훑어보았다. 몸싸움이 있었는지 옷차림은 흐트러진 채였으나,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반듯하게 묶어놓은 머리가 엉키거나 반쯤 풀어지고 손목에 감아놓은 붕대는 피로 젖어 있었다. 손에는 우습게도, 이샤크와 달리 상처 하나 없었지만. 그러니 피도 자신의 것이 아닐 테다. 이샤크는 ‘아리아케 레이’가 어떤 사람일지를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제 눈이 닿는 곳에 있게 된 ‘레이’는… 어떤 사람이지?
“그 사람, 죽은 것 같던데.”
“그랬을지도.”
대답은 선선했다. 사람을 죽였는데도. 도덕성의 결여인가. 훅, 의문이 끼쳐왔다.
의외였다.
의문이 아니라 흥미였다. 시야가 뚜렷하게 일렁거렸다.
“내 손님이었어.”
“이샤크가 고객이라서 온 거야?”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딱히 후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작게 미소가 샜다.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려고.”
여태까지 레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세상은 기계와 수학과 공학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레이는 아직 여기까지는 알 수 없을 단계니까. 실험을 반복하고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자가 있다면… 시설을 관리할 사람과, 기계를 보수할 사람과, 하다못해 현장을 청소할 인력, 그리고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계획하는 인물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샤크 디아즈는 각본가였다. 그러니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도 고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몇 번이나 흥미로운 복제인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반사회적이거나, 탐구적이거나, 협조적이지 않거나, 지나치게 온순한 개체를 지나 여덟 번째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 모두가 인간이었는가. 이샤크는 확고히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이제는 답을 얻었다. 그는 언젠가 뱉었던 말을 반복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눈앞에서 숨 쉬는 이는, 남의 피를 뒤집어쓴 이 사람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는 충분히 즐거웠다. 어떠한 동질감으로.
다시 말해, 세상에 둘 존재할 필요는 없었다.
“오래 살면 돼, 여기서. …방법이 있어.”
지난한 실험 끝에 그는 기어이 사람을 발명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