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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

Antiv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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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108분

공포 · SF 

유명인들의 바이러스와 세포 배양육을 판매하는 미래. 제리는 데이먼스 클리닉과 계약한 팝스타 시몬 벤더월에게 관심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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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는 포스터 속에 있었다. 제리는 건물 입구에 카펫처럼 깔린 포스터들을 내려다보았다. 비가 내렸고, 오가는 사람들이 짓밟은 얼굴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분홍색 종이조각들은 난도질 된 살점처럼 보였다. “바는 지하에 있어.” 릴리아나가 말했다.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제리는 순순히 건물 안쪽으로 끌려갔다. 지하에선 묘한 냄새가 났다. 담배 연기와 씁쓸하고 끈적한 공기가 섞여 있었는데, 들이마실 때마다 이 기분을 씻어내릴 술이 필요한 장소였다. 칵테일을 주문하고 나니 그래도 조금쯤은 더 머무를 기분이 났다. “여기 별론데.” 건너편 테이블들을 훑어본 제리가 말했다. 담배를 말던 릴리아나가 제리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풀린 눈을 하고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발견한 릴리아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냥 팬들이야.” “누구 팬?” “오면서 봤잖아.” 아니, 본 적 없어. 제리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무대에 불이 커졌다. 분홍색 생머리를 늘어뜨린 깡마른 여자가 그곳에 서 있다. 그녀가 귀에 찬 피어싱들과 검은 코트에 달린 체인이 똑같은 은색으로 빛났다. 언뜻 퇴폐적으로 느껴졌던 인상은 눈 밑을 섬세하게 나누는 속눈썹의 그늘과 그 위에서 말갛게 빛나는 눈동자가 녹여버렸다. 젊은 여자였다. 그리고 예뻤다. 곧 제리는 그녀가 뭉개진 포스터 속의 여자였단 걸 깨달았다.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뽑아든 여자가 뒤쪽의 밴드와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누구라고?” 제리가 물었다. 릴리아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담배를 물더니 무대를 턱짓했다. 일단 들어, 뭐 그런 뜻이었다. 여자가 왼손으로 마이크를 감싸 쥐었다. 귀에 단 것과 같은 재질의 반지들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걸려 있었다. 제리는 그녀의 약지 가장 안쪽에서 두드러지게 빛나는 은색 반지를 볼 수 있었다. 미소를 지운 여자가 입술을 벌렸다. I wanna be……. 쇳소리 섞인 달콤한 비음이 마이크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더 크고 부드러운 진동으로 돌아왔다.

 여자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제리가 그녀를 다시 본 건 3년 뒤, 데이먼스 클리닉에서 내건 거대한 옥외 광고 스크린 속에서였다. 새하얗게 빛나는 화면 속의 시몬은 좌우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긴 머리칼은 하나로 길게 땋아내려 밧줄처럼 그녀의 목에 한 바퀴 둘려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조여들 것 같이 불안해 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느긋이 주변을 둘러본 시몬이 정면을 보며 천천히 웃는다. 그게 다인 광고였다. 

 “숨이 막히죠.” 직원이 말했다. 제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직원은 모니터에 띄워둔 시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옥외 광고의 비하인드 씬이었다. “왜 그녀를 골랐는지 알아요.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목소리 끝이 약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이 상대하는 고객들만큼 그녀에게 빠진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제리는 직원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로 시선을 내렸다. 그들은 상담과 간단한 시술을 함께 하는 방에 있었는데, 이 새하얀 형광빛 방은 그의 명찰과 똑같은 색깔을 가졌다. “어딘가 완벽해 보이잖아요.” 직원이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모니터 속의 시몬이 땋은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다 말고 비틀거렸다. 겨우 균형을 찾은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제리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직원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제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패티아 씨.” 제리는 쓰고 있던 볼캡을 벗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제 이름은 제인 리메인이고 보건당국의 조사관이에요. 데이먼스 클리닉의 요청으로 도난 사건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협조 부탁드릴게요.”

 

 에두아르 패티아는 시몬 벤더월의 팬이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회사와 전속 계약한 이 젊은 아티스트를 구하고 싶어 했다. 무엇으로부터? 이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제리는 자신의 동료들이 도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차에 태워 가버리는 걸 지켜봐야 했다. “뭐였을까?” 제리와 릴리아나는 3년 전의 그 바에 앉아있다. 제리를 거슬리게 했던 냄새는 여전했지만,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던 관객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시몬이 더는 이 무대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릴리아나가 날씬하게 말린 담배를 제리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약초’라고 부르는 것들이 섞여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제리는 담배를 가져가기만 하고 피우지 않았다. 라이터를 꺼냈던 릴리아나가 어깨를 으쓱이곤 제 몫의 담배에만 불을 붙였다. “그 남자는 뭘 훔친 건데?” “그냥 흔한 플루 바이러스.” “플루?” “스톡홀름 공연 중에 감염된 건데…….” 릴리아나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제리는 그녀가 궁금해하는 게 시몬 벤더월의 일정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인기가 많대.” 제리가 어정쩡하게 말을 마쳤다. “큰 회사인데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람.” 릴리아나가 중얼거렸다. 데이먼스 클리닉의 보안 체계는 문제가 없다. 언제든 공공의료를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상품들을 파는 만큼, 데이먼스 클리닉은 특수한 기기를 통해 안전한 바이러스를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 스톡홀름의 차가운 공기 중을 떠다니다가, 시몬 벤더월의 점막에 들러붙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데이먼스 클리닉에 의해 추출되고, 기술자를 통해 비전염성 바이러스로 변형되어 길러진다. 기원이 어디였든 어디로 귀결되든 간에, 그 바이러스는 시몬 벤더월의 일부였다. 적어도 그녀의 팬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 남자, 그걸 자기 팔에 직접 주사했어.” 제리가 팔뚝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암시장으로 빼돌린다더라.” 제리는 독감으로 고생하는 에두아르 패티아를 상상했다. 시몬이 그랬듯, 그는 바싹 마른 입술로 눈을 뜨고, 끓어오르는 이마를 식히기 위해 세면대로 간다. 거울 속에 있는 퀭한 얼굴은 건강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 기억을 잊게 만든다. 예전의 자신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남자가 세면대를 누르며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틀 동안 그는 피 섞인 가래, 구토, 폐렴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돈이 그 모든 걸 기꺼이 견디게 해줬을 리 없다. 조금이라도 애정이 섞여 있을 거라고 믿는 게 차라리 나았다. 에두아르 패티아를 위해서라도. 그래봤자 이 이야기가 더 끔찍해질 뿐이지만……. 제리는 입맛이 떨어진 표정으로 찬물을 들이켰다. 에두아르 패티아의 고통보다는 그가 한 말을 떠올릴 때였다. “젊은 여가수를 위험에 빠트리는 게 뭐지?” 그 질문에 릴리아나가 연기를 길게 뱉더니 무대 위에 오른 새 얼굴을 응시했다. 그 소녀는 3년 전의 시몬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모든 것.”

 

 시간이 더 흐르자, 모든 것으로부터 시몬 벤더월을 구조하려는 시도 역시 그녀를 위험하게 만든단 게 명백해진다. 제리는 한 팝스타가 사망했다는 속보를 본다. 제리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두르고 반짝이는 은제 액세서리를 찬 팬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제리는 다 식어가는 종이컵을 텔레비전 위에 내려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흰 침대에 파묻힌 창백한 얼굴이 검은 수면안대를 벗어 내렸다. “음, 난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했지만?” “매니저는 이 편이 낫다더라고……죽은 사람을 테러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웅얼대는 시몬의 입술에는 반투명한 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제리는 곧 그녀의 진짜 장례식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분명 죽어가고 있다.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술과 담배, 외로움 같은 것들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시몬이 쿡쿡 웃는 소리를 냈다. “내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 “약간……미안해요.” “다들 오해하고 있어……나한테 죽을 마음이 없다는 거야.” 그게 남들 생각과 다르게 죽을 마음이 없다는 건지, 죽음을 바라지만 다들 그녀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여긴다는 건지……제리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시몬이 잔뜩 쉰 기침을 뱉었다. “담배 있어?” “여기 들어오면서 다 반납했다구요.” “미안, 내 가드 엄청 깐깐하지.” “그 사람도 당신 좋아해요?” “어……아직 안 물어봤는데…….” “흐음.” 관성적으로 품을 뒤지던 제리가 멈칫했다. 셔츠 앞주머니에 릴리아나가 말아줬던 담배가 잡혔다. 이제 제리는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한 대라도 같이 피워줄 걸 그랬지. 제리는 뒤늦은 후회를 밀어두고 그 완벽한 담배를 시몬에게 내밀었다. 필터가 조금 뭉툭해졌지만 여전히 날씬했고 내용물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라도?” 시몬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담배를 가져가 입에 물었다. 그리고 베개 밑에서 꺼낸 라이터를 몇 번 달칵였다. 불꽃만 튀고 불은 붙지 않았다. 제리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나 좋아해?” 담배를 입에서 뗀 시몬이 말했다. 제리는 언젠가 릴리아나가 그랬던 방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제리는 시몬의 삶에 뛰어드는 것보다 그녀와 연관되는 더 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마 시몬 벤더월의 팬이 되어도 좋았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보답받을 일 없는 사랑을 쏟아붓는 편이 당연히 더 쉽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일이 있었을 뿐이다. 제리는 시몬이 시트 위로 내던진 라이터를 주워들어 부싯돌을 당겼다. 시몬이 얼른 담배를 물었다. 찰칵, 위로 길쭉하게 뻗은 불꽃이 담배 끝을 그을려 놓기 시작했다. “친구가 되고 싶어요.”

컨텐츠 정보

출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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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리메인

Jain Remain

포도잼, 홍짱

시몬 벤더월

Symon Vanderwa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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